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뤼흐 스피노자 (문단 편집) === 사회와 행복 === 스피노자는 윤리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선이거나 악인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또한 신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며,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나 동일하게 비를 내려준다.[*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연상시킨다. 몇몇 학자들은 당시 유럽에 전해진 중국 사상의 영향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다만 예수회를 통한 간접적인 증거만 있을 뿐, 실제로 스피노자가 중국의 책을 읽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그러므로 선악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코나투스)을 증가시키면, 우리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을 '선'이라고 하면서 그것에 의해 더욱 변용되기를 원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을 감소시킨다면,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악'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원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은 이러한 선악의 윤리를 바탕으로 더 큰 역량, 활동성, 기쁨 및 자유을 위해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스피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스피노자는 인간 본성상 '일치하는' 방식으로 관계맺는 것과,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관계맺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사회를 정의한다. 우리가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어떤 것의 본성을 우리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본성상 우리와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일치하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에 있어서 그만큼의 역량이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물이 본성상 우리와 공통적인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정념의 지배를 받는 한, 인간 존재는 어떤 것을 본성상 일치시킬 수 없다. 정념은 우리 자신의 본성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수많은 사물들의 자극을 더 많이 반영하므로, 우리는 그 사물들의 자극이 우리의 본성이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념이라는 정서에 의해 갈라지는 한, 사람들은 각기 처한 정념의 상황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의 지도에 따라 유덕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본성상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성의 지도를 따른다면, 그들은 실로 자신들의 인간 본성에 좋은 것을 추구할 것이고, 결국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 개념'과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더욱더 유익해질 것이므로, '이성의 지도로 살아가는 다른 인간 존재'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타인과의 협동과 유대를 통해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획득한다. 즉, 그는 이성의 힘에 의해 능동성을 띠게 되는 코나투스(욕망)를 논의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개인의 활동 역량의 확장과 증대를 위한 사회의 구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마음맞는 두 사람의 역량이 합치면 더 큰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협력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매우 유익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조직함으로써 위험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더 안정적인 조건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힘만으로 해낼 수 없었던 많은 새로운 일들이 가능해진다. 결국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정서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덕과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자유와 활동 역량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역량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스스로를 좀더 유능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우애로 결합하고자 하며, 호의와 친절을 베풂으로써 서로의 기쁨을 증대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서로 일치하고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을 좀더 유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덕'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치의 역량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홀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협력하여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더욱 자유롭다.[* 『에티카』 4부 정리7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